대구시 노원동 삼영알미늄의 홍영환 부장이 꽃무늬 밥상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한상갑 기자

원자 기호 Al, 원자번호 13. 알루미늄은 가볍고 무른 고체로 현재 철광석 다음으로 많이 생산되고 있는 금속이다. 19세기 후반 전기분해법에 의한 제조법이 발견돼 대량생산이 가능해졌지만 한때 알루미늄은 금보다 더 귀한 대접을 받았다.
유명한 알미늄 애호가였던 나폴레옹 3세는 황실에서 계급에 따라 식사도구를 구별 했는데 하층귀족엔 은수저, 상층 귀족엔 금수저를, 그리고 최고 황실가족엔 알미늄 수저를 쓰게 했다고 한다.
1960~70년대 한국에서 알미늄은 서민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양은냄비, 양은주전자로 대표되는 알미늄 제품은 당시 주 연료였던 연탄과 찰떡궁합을 이루며 시민들의 생활 속에 깊이 파고들었다.
찌고, 끓이고, 삶던 요리를 담당하던 알미늄 제품은 1980년대에 들어와 급격히 사양길에 접어들고 만다. 우선 연탄 대신 도시가스, LPG, 기름 등 연료들이 등장해 더 이상 고(高)열전도 주방기구가 필요하지 않게 되었고, 주방용품도 스테인레스 등으로 대체되었기 때문이다.
석유곤로와 함께 사라졌던 양은이 다시 나타난 것은 1997년 IMF 사태 이후. 지갑이 얇아진 서민들은 주방기구를 다시 값싼 양은그릇으로 대체했다. 우울한 경제 탓에 복고적인 사회 분위기도 한몫했다. 누런 황금색에 금의 풍요를 기원했다는 사회학자의 분석도 있었다.
대구에도 이 알미늄과 역사를 함께해온 기업이 있다. 노원동에 삼영알미늄(대표 홍이암)이다. 1979년에 설립된 삼영은 단순히 주방기구만 만든 것이 아니라 현대 역사 흐름 속에서 서민들과 모든 애환을 함께 나눠 왔다 

알미늄 원판을 냄비 모양으로 성형하는 프레스 작업 모습.

◆냄비 만드는데 30여개 공정, 대부분 수작업=1979년에 설립된 삼영알미늄은 42년 동안 알미늄 주방기구 생산 한길을 걸어왔다. 총 9명의 직원이 양은냄비를 비롯 도시락, 양푼, 쟁반, 밥상 등 주방용품을 만든다.
25일 공장을 찾아간 날 40년 경력의 곽병근 씨가 양은냄비를 만들고 있었다. 양은그릇 제작의 첫 출발은 둥근 알미늄판. 이 원판을 프레스에 찍으면 대략적인 그릇 형태가 나온다.
곽 씨는 “이 자리(프레스)를 거쳐 간 10명을 불러 모으면 손가락이 성한 사람이 하나도 없다”며 “그래도 청춘을 다 바친 이 자리가 떳떳하고 자랑스럽다”고 말한다.
1차 성형이 완성된 냄비는 손잡이 공정에 들어간다. 냄비에 구멍을 뚫고 리벳을 박는 과정은 대부분 수작업이지만 30년 이상의 경력자에게 단 1mm의 오차도 허용치 않는다.
손잡이가 완성된 냄비는 도금에 나선다. 전기가 통하는 황산용액에 12~14분쯤 담가 놓으면 냄비에 얇은 코팅막이 입혀진다. 표면처리가 끝난 그릇은 염료통에 다시 2~4분간 담그는데 이 과정을 통해 은색 알미늄이 황금색의 냄비로 변신한다.
냄비 하나 만드는데 거치는 공정만 모두 30단계. 수많은 과정에도 불량률이 제로에 가까운 것은 직원들 대부분이 30~40년 경력자들이기 때문.
홍영환 부장은 “공단에 흔한 외국인근로자들이 우리 공장에 한 명도 없는 것은 모든 공정이 10년 이상 숙련과 고도의 집중도를 필요로 하는 작업이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현재 알루미늄 주방기구 시장은 대구가 주도하고 있다. 한 때 부산, 인천 등 업체들이 알루미늄 그릇 생산을 시도했지만 모두 실패로 끝났다. 복잡하고 까다로운 수작업 공정을 수행할 숙련 기술자들이 없었고, 냄비손잡이, 철제 상다리 같은 부자재 업체가 대구에 몰려 있었기 때문.

냄비에 손잡이를 부착하는 레벳팅 작업 모습.

◆복고, 레트로 감성 타고 인기 아이템 부상=공장 내부 한쪽에서는 밥상에 꽃무늬를 입히는 공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원색 톤의 화려한 색감은 알미늄 밥상의 트레이드 마크.
최근 tvN ‘삼시세끼’나 ‘응답하라 1997’ 등에서 소품으로 등장하면서 시청자들의 향수를 자극했다. 최근엔 코로나-19 사태로 혼술, 혼밥이 유행하면서 SNS 상에서 인증 샷이 많이 떠도는데 여기서도 꽃무늬 밥상이 빠짐없이 등장한다.
밥상 원판에 꽃무늬 염색지를 올리고 고압 프레스로 누르면 밑의 열판과 작용해 착색이 이루어지는 구조다. 변변찮아 보이는 꽃무늬도 사실은 3톤의 압력과 250도의 고열 환경의 결과물이다. 자연에서 꽃도 습도, 일조, 온도의 결과물이 듯 양은 위에 꽃도 ‘시련’ 속에서 피어난다.
한편에서는 40년 경력의 황갑수 씨가 시보리(제품 성형) 작업을 하고 있었다. 작은 그릇들은 프레스로 찍어 1차 성형을 하지만 찜통 같은 큰 그릇은 대부분 수작업으로 이루어진다. 금속가루 날리는 기계 앞에서 황 씨는 긴 쇠막대를 사용해 그릇의 모양을 잡아가고 있었다.
얇은 금속 원판이 큰통으로 성형되는 과정은 순전히 작업자의 손과 팔, 허리의 감각만으로 이루어진다. 먼지가 날리는 작업장 속에서 철재 봉과 씨름하기를 잠시 종이장처럼 날렵한 대형 찜통이 모양을 드러냈다.
성형 공정에 따라 사용되는 철제봉은 7~8개. 10kg남짓 쇠뭉치부터 마무리용 소도구도 있다. 1평 남짓한 공간에서 황 씨는 40년 넘게 이 작업을 해왔다. 수십년 단련된 몸이지만 오후 무렵엔 온몸이 결려온다. 작업 중 쌓이는 긴장, 피로는 양은냄비에 끓이는 새참 라면으로 푼다.

직원들이 완성된 제품을 검수하며 포장을 하고 있다.

◆9명 근로자 대부분 30~40년 경력 베테랑들=현재 삼영엔 모두 9명의 종업원이 근무하고 있다. 대부분 20~40년 경력의 베테랑들이다. 쇳가루 먼지 날리는 공장에서 매일 같은 일상이 반복되지만 이 일 만큼은 자신이 가장 자신 있고 이 일로 가정을 지켜 왔으니 체력이 허용하는 한 이 작업을 계속해 나갈 것이다.
현재 양은주방기구 생산량은 예년의 3~4배 수준으로 늘었다. 이런 특수 배경은 20여년 전 IMF 상황과 유사하다. 경기침체로 인한 사회적 우울과 코로나 블루가 비슷하고, 복고 분위기 확산도 닮아있다.
이렇듯 양은그릇은 어느 순간 튀어나온 게 아니다. 레트로 감성 같은 사회적 분위기가 작용했고, 불경기, 코로나를 지혜롭게 넘기기 위한 국민들의 경제적 요구도 반영된 결과다. 온 국민이 힘을 모아 IMF 위기를 넘겼듯 현재 코로나 사태나 경제 위기도 우리 국민의 저력 앞에 무릎을 꿇고 말 것이다.

은색의 알루미늄이 염료 속에서 황금색으로 바뀌듯...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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