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여백
HOME 기획/현장 기획/시리즈
[정 듬뿍·추억 가득! 영남 전통시장] ㊶대구 대명시장1980년대 대명동 대구대, 계명대캠퍼스 시절 최고 호황기 누려
대구시 남구 대명시장은 주변 두류, 남산, 대명동 수천 일대 주택가의 상권을 배경으로 45년 동안 상권을 유지해왔다. 한상갑 기자

어느 전통시장이든 시대의 흐름에 따라 부침(浮沈)을 거듭한다. 보통 1970년대엔 인구 감소와 이농현상이 주요 원인이고, 근대에 들어서는 온라인 쇼핑몰과 대형마트의 등장이 주 이유다. 때론 도시 개발 같은 시장 주변의 갑작스런 환경 변화가 그 원인이 되기도 한다.

대구시 남구 대명시장은 한때 대명동, 남산동, 두류동 일대 상권의 중심이었다. 주변에 대학을 두 개(대구대, 계명대)나 끼고 반경 1km 이내 수만 세대 주택단지를 배경으로 호황을 누렸다.

어느 날 두 대학의 주요시설과 단과대가 대명동을 떠났다. 대구대는 1985년 경산시 하양읍으로, 계명대는 1996년 달서구 신당동으로 캠퍼스를 옮겼다.

캠퍼스 이동은 3만여 명에 이르는 학생들만 옮겨 가는 게 아니다. 학생들을 부양하던 의식주 상권까지 함께 옮겨 가는 것을 의미한다. 당장 자취, 하숙, 원룸가가 텅텅 비었고 학생들이 식사와 유흥을 책임지던 식당, 주점가도 공동화 되어갔다.

이 여파는 그대로 인근 대명시장에도 직격탄으로 날아왔다. 간식집, 반찬집, 식당, 주점들이 순식간에 고객을 잃고 매출 절벽을 실감해야 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현재 시대명장은 아직도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다. 대학들은 떠났지만 대명, 남산, 두류동 주택가들이 든든하게 상권을 받쳐 주었기 때문이다. 46년 동안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서 대구 남부의 상권을 든든히 지켜온 대명시장으로 떠나 보자.

◆임진왜란 때 귀화한 두사충 ‘대명동’ 명명=잘 알려진 이야기지만 대명동은 임진왜란, 정유재란 때 참전했던 명나라 장수 두사충과 관련이 있다. 두사충은 시인 두보(杜甫)의 21세손이고, 이순신과 전우애를 나누었던 명장 진린(陳璘)의 처남이기도했다. 정유재란이 끝나고 조선에 남은 두사충은 대구에 정착했는데 자신이 살던 동네 이름을 ‘대명동’이라고 불렀다.

정작 자신은 모국을 등졌지만 자신이 거주하던 세거지에 나마 그 연모의 흔적을 남기려고 했던 것 같다.

중국에서도 명문가였던 두사충이 명을 버리고 귀화한 이유에 대해 자세히 알려진 바는 없지만 이미 만력제(萬曆帝) 시대 명에 망국의 기운이 드리운 것을 간파하고 이런 결심을 굳혔다는 해석도 있다.

더 재밌는 것은 임진왜란 중 조선에 귀화하여 대구의 우록동에 정착한 일본 장수 김충선도 같은 사연을 남겼다는 점이다. 두사충과 김충선이 직접 교류했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둘은 서로의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귀화 영웅과 항왜(降倭) 장군이 대구라는 한 공간을 배경으로 귀화 스토리를 남겼다는 점에서 두고두고 사가(史家)들의 화제가 되고 있다.

물론 두 인물의 스토리는 400년 전의 일이고 현재 대명시장과 두사충과도 아무런 연결성이 없다. 다만 계산동에 살던 두사충이 고향 생각이 날 때마다 앞산에 올랐는데 산행길에 지금 대명동 시장자리에서 목을 축였을 것이라는 막연한 개연성만 있다.

대명시장에는 주변 주택가 주부들의 수요를 반영해 반찬집들이 많다.

◆대학가, 주택단지 품고 1980년대 가장 번창=대명시장 역사는 4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950년대 대구대와 계명대가 대명동에 자리를 잡으면서 유동인구가 갑자기 늘게 되었는데 이것이 시장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 학교가 들어서면 학생들은 물론 그 직원들이 함께 거주하기 마련이고 또 이들의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해 시장수요가 생겼던 것이다.

1980년 후반 필자도 취업 준비 시절 몇 개월 대구대도서관을 드나들었는데 이 무렵 점심때 시장 상가는 교행이 불편할 정도로 인파가 붐볐다.

그 당시 웬만한 칼국수나 분식은 1,000원이면 해결되었고, 귀갓길 친구와 술집에 들러도 둘이 3천 원이면 술값이 충분했다. 학생들이 몰려들고 주택가 배후 상권이 든든했던 이 무렵이 대명시장의 최고 전성기가 아닌가 한다.

지난 12일 취재를 위해 대명시장에 들렀다. 아마 10여 년 만의 발걸음이었다.

다행히 비가림 아케이드를 설치한 건 말고 시장의 전체적인 외형은 그대로 간직하고 있었다. 명덕로에서 성당로로 이어지는 100m 남짓 메인 상가도 그대로 남아 있었지만 시장의 유동인구는 20여 년 전과 큰 차이가 있어 보였다. 요즘 무더위 장마 시즌을 감안하더라도 시장 손님은 예전에 30%도 안 돼 보였다.

시장 주변에 어르신들이 많다 보니 대명시장엔 잡화점이 많은 것도 특징이다. 상가에 때밀이수건, 고무신, 나프탈렌, 노란고무줄, 목장갑 등 올드 상품들이 많이 눈에 띈다.

◆반찬, 간식, 야채류 등 완비, 도심시장 특성 갖춰=대명시장이 50년 가까이 대명동 일대 상권을 유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바로 수천 가구에 이르는 대명동, 두류동 일대 주택가가 든든한 시장 배후가 돼주었기 때문이다.

이런 시장수요를 배경으로 대명시장의 주요 취급품목은 반찬가게, 야채, 과일, 생선, 생필품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시장에서 만난 한 주부는 “요즘 무더위에 매 끼니끼니가 부담스러운데 가족끼리 나와 분식으로 한 끼를 깨운다”고 말한다. 급히 반찬이 필요할 때도 시장으로 나와 반찬 서내팩만 사면 금방 한 상을 차려 낼 수 있다.

주변에 어르신들이 많다 보니 잡화점 류가 많은 것도 특징이다. 지금도 상가에 때밀이수건, 고무신, 나프탈렌, 노란고무줄, 목장갑 등 올드 상품들이 많이 눈에 띈다.

재밌는 것은 인근 원룸촌과 주택단지에서 중국 근로자들이나 조선족들이 대명시장을 많이 찾는다는 것. 두사충 후손들이 세거지로 삼았던 대명동이나 대명시장은 요즘으로 치면 차이나타운과 비교된다.

요즘도 중국 관광객들이 대구에 오면 제일 관심을 갖는 것이 모명재나 거주지였던 계산동 일대라고 한다. 물론 이들이 ‘대명동’의 유래를 들으며 중화적 자부심이 고양될 수도 있겠다.

어쨌든 한·중·일 3국이 임진왜란 소용돌이 속에서 대명동을 배경으로 흥미로운 역사를 펼쳐 나갔다는 사실이 흥미롭기 만하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저작권자 © 디지털경제,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한상갑 기자의 다른기사 보기
icon인기기사
기사 댓글 0
전체보기
첫번째 댓글을 남겨주세요.
Back to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