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농촌 오일장은 지역 특산품의 유통, 상거래를 넘어 주민들의 사교, 친목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군위시장 모습. 한상갑 기자

고대 그리스 델포이에서는 1년에 한 번씩 신전(神殿) 축제를 열었는데 축제기간에 시장을 열어 가축, 의류, 노예, 금·은제품을 거래 했다고 한다.

중세에서도 교회나 수도원을 배경으로 정기적으로 축제를 열었는데 여기서도 축제 행사로 어김없이 시장이 등장한다. 즉 역사적으로 시장이 마을공동체의 축제나, 부락민들의 소통의 장으로 기능해 왔다는 것을 입증하는 사례다.

최근 취재를 위해 경북 지역 오일장을 답사하면서 이런 사례를 자주 확인하게 된다. 시골 오일장이 본업인 유통, 상(商)행위 못지않게 지역민들의 커뮤니티로 역할을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3일 방문한 경북 군위시장에서도 지역민 ‘소통의 장’으로서의 전통시장 역할을 확인할 수 있었다. 시장을 가득 메운 인파의 행렬엔 단순한 ‘구매’외 다른 열기와 에너지가 감지 되었다.

지역 특산품의 유통, 교환, 상거래를 넘어 주민들의 사교, 친목공간으로 자리를 잡아가고 있는 군위시장으로 떠나 보자.

◆옛 오일장은 주민들의 소통의 장이자 사교의 장=우리의 속담, 격언 중엔 장날, 오일장과 관련된 말들이 많다. 이는 장날이 전통시대 우리 일상과 풍속에 녹아 있음을 뜻한다.

통신, 교통이 발달하지 않았던 전통시대 민초들의 의사소통은 주로 대면(對面)으로 이루어졌는데, 이 대면 커뮤니케이션 중에 가장 대표적인 것이 장날이었다.

장날엔 지역의 물산과 재화가 모이기도 하지만 지역 사회의 중요 정보와 집안들의 사적인 정보도 함께 유통되었다. 청림문화재연구소 박승규 원장은 “전통시대에는 관혼상제와 같은 문중에 대소사와 개인들의 정보가 장날을 통해 전해졌다”고 말한다.

결혼 적령기 남녀의 혼담이 주로 오가는 것도 장날이었다. 혼기를 앞둔 자녀를 둔 부모가 장날 객주에서 만나 술 한 잔에 사돈으로 발전하는 사례도 전통시대에서는 흔히 있는 일이었다. (이 바람에 정작 당사자들은 결혼식 당일 날에서야 얼굴을 확인하는 해프닝이 벌어진다.)

거주, 활동범위가 좁았던 전통시대 장날은 지역 주민들이 가장 비중 있는 사교의 장이었다. 주민들은 꼭 사고 팔 물건이 없어도 장터에 나와 시장 물가의 흐름을 보거나 이웃마을에 지인, 벗, 친척들과 만나 술과 음식을 나누며 교제를 나누었던 것이다.

매월 3, 8일 열리는 군위장날엔 새벽 6~7시부터 농산물을 이고 온 인근 어르신들과 전국 각지에서 온 행상들의 자리다툼이 치열하다고 한다.

◆매달 3, 8일장에는 노점, 행상들 북적=선사시대 이후 군위가 지역 역사에 전면으로 등장한 기록은 잘 보이지 않는다. 안동, 영주, 상주, 영천 등 대도시 사이에서 뚜렷한 존재감을 드러내기 보다는 속군(屬郡), 속현(屬縣)을 반복하며 군세(郡勢)를 유지해왔음을 알 수 있다.

현재 군위군은 인구 2만4천 명의 소도시로 위축돼 지방 소멸을 말할 때 항상 맨 앞에 놓이는 신세가 되었다. 그러나 군위도 한때 인구 8만여명을 거느린 ‘화려한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따라서 군위시장엔 옛 영화를 누리던 번화가 시절의 흔적이 아직 많이 남아있다.

3일 오일장 취재를 위해 중앙고속도로를 타고 군위로 향했다. 시장에 이르자 제일 먼저 시장 주변을 가득 메운 차량들이 취재진을 맞았다. 군위읍 서부리 대로변도 이미 주차된 승용, 화물차로 길게 늘어서 있었다. 시장 주변을 두 세 바퀴나 돈 후 겨우 차를 주차하고 시장으로 향할 수 있었다.

시장 입구부터 노점들이 길게 늘어서 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매월 3, 8 장날엔 새벽 6~7시부터 농산물을 이고 온 인근 어르신들과 전국 각지에서 온 행상들의 자리다툼이 치열하다고 한다. 덕분에 장터는 경북 각지 특산품들은 물론 동해에서 올라오는 수산, 해산물로 가득 채워진다.

시장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밭에서 가꾼 채소를 재미 삼아 팔러 나왔다”며 “몇푼 용돈이 생기는 재미도 크지만 이런 소일거리가 있다는 사실이 더 즐겁다”고 말한다.

시장을 찾는 연령층이 주로 농촌어르신들이다보니 장터 진열상품도 대부분 ‘올드 계열’이나 농기구들이 많다. 방한 털신, 덧버선, 노란고무줄, 때밀이 수건, 카세트테이프, 나프탈렌 같은 용품들이 많이 눈에 띤다.

◆닭발요리, 호떡, 국화빵 등 간식거리 푸짐=오일장의 꽃은 뭐니 뭐니 해도 푸짐한 간식과 먹을거리다. 군위시장도 곳곳에 손맛을 자랑하는 식당들이 성업 중이다.

씨앗호떡, 국화빵부터 인절미, 깨강정, 닭강정 노점·점포들이 각자의 맛과 솜씨를 뽐내며 손님들을 맞는다.

노점에서 10년 넘게 호떡을 구웠다는 한 주인은 “시골장터지만 장날엔 손님들이 넘쳐 하루 1천~2천개를 판다”며 “장날 덕에 5일마다 온 시골에 생동감이 돈다”며 웃었다.

취재를 하는 중에도 호떡줄이 길게 늘어서 장터맛집, 노점의 명성을 확인할 수 있었다.

간식이 어린이, 부녀자들이 입맛을 자극한다면 군위시장에서 어르신들의 ‘최애템’은 단연 닭밝요리다. 군위시장 닭발 집은 의성시장 ‘할매닭발’과 쌍벽을 이루며 군위 오일장 맛집의 존재감을 뽐낸다.

취재 팀도 점심과 반주 한잔을 위해 들렀다가 20분 넘게 입구에서 대기 줄 불편을 감수해야 했다.

시장에서 만난 한 어르신은 “오랜 만에 친구들과 시장에 나와 술 한잔 나누며 세상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며 “장날이라서 사람들이 북적거리니 사람 사는 냄새도 나고 술자리 흥도 더 난다”고 말했다.

군위시장의 대표 음식인 닭발요리.

◆취재 후기=식당을 나오니 바로 시장 골목에 카세트 테이프 노점이 신나는 음악을 틀고 손님을 끌고 있었다. 한 아주머니가 “고물상, 앤티크 숍에만 있는 줄 알았던 카세트 레코더가 여기에 있네” 하며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노점상 주인은 “요즘도 농촌 가정엔 카세트가 많이 남아 있다”며 “아직도 농촌에서는 테이프로 음악을 듣는 어르신들이 많다”고 말한다.

테이프를 고르고 있는 어르신들을 보면서 요즘 농촌의 시계는 1980~90년에 머무르고 있음을 느낀다. 세상은 이미 CD, MP3를 지나 온라인 음원, 유튜브 시장으로 넘어와 있는데 마그네틱테이프로 음악을 듣고 있는 이곳 현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벤자민의 시계처럼 시간이 거꾸로 돌지는 않지만 도시인의 일상보다 더디게, 느리게 도는 이곳의 시간이 더 정겹게 느껴진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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