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만 해도 향촌동 일대는 노점, 좌판들이 시장을 가득 메워 통행이 불편할 정도 거리가 붐볐다. 현재 시장엔 39개의 소규모 점포가 남아 겨우 시장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한상갑 기자

영화 ‘중경삼림’의 공간적 배경인 홍콩 카오룽(九龍)의 청킹맨션은 한국인 관광객에게도 잘 알려진 곳이다. 거미줄처럼 얽힌 건물 내부에서 벌어지는 네 남녀의 만남과 사랑은 ‘홍콩 반환’이라는 사건과 맞물려 세계 영화팬들의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슬럼가를 연상케 하는 낡은 건물과 미로 같은 상가의 독특한 구조는 1990년대 홍콩의 주거문화를 들여다 볼 수 있는 키워드가 되었다.

대구에도 청킹맨션과 비슷한 곳이 있다. 바로 중구 포정동에 있는 무궁화백화점과 대보백화점이다. 1990년에 세워진 이 빌딩은 을씨년스런 건물 외관과 미로 같은 상가 내부, 주상복합 형태까지 충칭맨션과 무척 흡사하다.

대구의 전통시장을 소개하면서 홍콩 영화에 등장하는 건물 이야기를 늘어놓은 것은 대구 무궁화백화점과 홍콩 청킹맨션의 이미지가 묘하게 겹치기 때문이다.(하나는 홍콩 반환이라는 세기적 사건의 공간으로써, 또 하나는 일제와 6·25를 거치며 대구 상권의 중심으로 도약한 역사적 공간으로써)

대구의 청킹맨션, 향촌동의 무궁화백화점·대보백화점으로 떠나보자.

◆대구선 철도 공사 때 인부들 숙식 위해 시장 건립=오늘의 탐방지 중앙시장을 알기 위해서는 한말 대구읍성 시대를 잠시 들여다볼 필요가 있다. 1906년 일제는 조선 왕조의 행정, 상업의 중심이었던 대구읍성을 허물고 성곽이 있던 자리에 신작로를 내며 4성로(동·서·남·북성로)시대를 열었다. 이후 북성로가 있던 향촌동 일대는 일제강점기를 거치며 대구의 중심거리로 성장했다.

북성로가 대구 경제의 중심으로 다시 한 번 도약 하게 된 계기는 1900년대 초 경부선 개통이었다. 당시 공사를 위해 수천명의 일본인 기술자, 국내 인부들이 몰려들었는데 대구엔 이들을 수용하기 위한 숙식시설이 필요했다. 당시 번화가였던 북성로 일대, 중앙시장은 그 수요에 대응하기 위한 대안이었다.

이때부터 북성로엔 기술자, 인부들을 위해서 숙소, 유흥가, 요정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당시 향촌동 일대는 거리마다 불야성을 이루었는데 유흥업소와 종사자들에게 생필품과 식재료를 제공하던 곳이 바로 중앙시장이었다.

젊음의 에너지가 사라진 향촌동은 중년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현재 골목엔 막걸리집, 전집, 떡집, 돼지국밥, 방앗간, 재래용품 등 어르신들을 위한 점포가 꾸며져 있다.

◆일제시대 미나카이백화점 들어서며 대구 핵심 상권으로=일제시대 대구는 경부선이 개통되면서 근대도시로서 면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이런 상업도시로 후광을 업고 북성로, 향촌동 일대는 서울의 명동, 부산의 남포동과 함께 한국 대표적인 번화가로 부상했다.

1930년대 들어 일본의 경제 침탈이 본격화되면서 대구엔 일제의 상업자본이 들어오기 시작하는데 대표적인 것이 1934년 북성로에 들어선 미나카이백화점(三中井商店)이었다. 일본 상인 나카에 카츠지로(中江勝治郎)가 건립한 이 백화점은 대구 최초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건물로 유명하다.

개점 당시 주민들이 엘리베이터를 한번 타기 위해 연일 장사진을 이루었다고 한다. 고객 수는 하루 50~70 명이었지만 삼덕동 등 당시 부촌에 거주하던 일본인들이 주 고객이어서 매출이 쏠쏠했다. 이들은 잡화 도·소매는 물론 고리대금업까지 겸하며 대구 상권을 장악해 갔다.

미나카이백화점이 들어서며 북성로 일대는 일약 대구의 중심 거리로 부상했다. 당시 관보(官報)에 의하면 ‘북성로에는 포목점, 양복점, 모자점, 신발점, 시계포, 장신구, 고물상, 철물점, 백화점이 들어서 밤에도 언제나 대낮처럼 환하다’고 적고 있다.

당시 북성로에는 일본 상인이 운영하는 점포가 107곳이나 있었는데 조선인 3명이 일본인 틈바구니에서 곡물가게를 겨우 열었다고 한다.

영화 ‘중경삼림’의 공간적 배경인 홍콩 카오룽(九龍)의 청킹맨션.

◆1980~90년대 향촌동은 젊은이들의 성지=해방 이후 대구는 해외 귀환동포 정착과 피난민의 유입으로 급격히 인구가 증가했다. 또 일찍부터 섬유산업에 뛰어들었던 대구는 6·25동란을 맞아 전쟁 특수를 바탕으로 산업적으로 부흥기를 누렸다.

대구로 피난 온 예술가들은 향촌동 다방, 주점에 모여 전시(戰時) 문학, 미술, 음악을 일구었는데 이중섭, 구상, 유치환 등이 주 멤버였다. 이들은 향촌동 일대에서 다방, 술집을 누비며 일세대를 풍미했는데, 이 덕에 향촌동은 전국 3대 주점가 중 하나로 도약할 수 있었다.

향촌동의 중심에 위치한 중앙시장은 1980년대까지 대구 최고의 번화가 중 하나로 상권을 유지했다. 바로 이무궁화백화점과 대보백화점은 향촌동 전성시대를 상징하는 건물이었다.

2대째 향촌동 근처에서 살고 있다는 이정광 송죽씨어터 대표는 “1980년대만 해도 무궁화백화점엔 롤러스케이트장, 오락장이 들어서 당시 젊은이들에게 성지 같은 곳 이었다”며 “자신도 초등학교 시절 도서, 완구를 사러 이곳에 자주 들렀다”고 회상했다.

이 대표는 “1980~90년대 향촌동은 부유층과 서민들의 상권이 조화롭게 공존하던 특수한 쇼핑 공간이었다”고 말한다. 즉 백화점에서는 부유층들의 럭셔리 쇼핑이, 바로 밑 중앙시장에서는 서민들이 반찬, 간식, 채소 등 생계형 구매가 이루어졌던 것이다.

무궁화백화점의 상가 내부 모습. 좁은 골목을 따라 상가들이 늘어서 있다.

◆동성로 일대로 상권 넘어가며 중년들의 놀이터로=대구의 영화를 구가하던 북성로, 향촌동 일대가 쇠퇴기에 접어든 건 1966년 포정동에 있던 도청사가 산격동으로 이전하면서부터.

대형 관공서가 향촌동을 떠나자 상권은 대구역 부근으로 급속히 이동했다. 국세청 등 관공서와 대구백화점이 동성로에 들어서며 상권은 동성로 일대로 완전히 넘어가버렸다. 불과 10m도 안되는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향촌동과 동성로는 웃고 우는 처지가 되었다.

주심에서 부심으로,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려나면서 향촌동 상권은 급격히 쇠락해 갔다. 여기에 대형마트들이 잇따라 대구 유통시장을 점령하면서 중앙시장은 점점 설 곳을 잃어 갔다.

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1990년대만 해도 두 백화점 건물 사이에 상가를 이용한 꽤 큰 재래시장이 형성되었다”며 “당시 향촌동 일대는 노점과 좌판들이 시장을 가득 메워 통행이 불편할 정도 였다”고 회상했다.

젊음의 에너지가 사라진 향촌동은 그후 중년들의 놀이터로 변했다. 현재 시장엔 39개의 소규모 점포가 남아 겨우 시장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골목엔 막걸리집, 전집, 떡집, 돼지국밥, 방앗간, 재래용품 등 어르신들을 위한 점포가 꾸며져 있다. 요즘 그 흔한 아케이드 하나 없어 ‘여기가 시장터’라고 말해 주지 않으면 그 존재조차 모르는 신세가 되었다.

상권이 쇠퇴해 이젠 시장 흔적조차 찾기 어렵게 되었지만 북성로와 중앙시장의 가치까지 희미해진 건 아니다. 이곳이야말로 대구의 근현대사, 대구의 정체성이, 대구의 과거와 현재가 잘 간직된 역사 공간이기 때문이다.

김원자 문화해설사 는 “대구에서 대보백화점, 무궁화 백화점은 단순한 상업공간 의미를 넘어 일제강점기부터 근·현대에 이르기까지 역사적으로 큰 상징성을 갖는다”며 “향촌동에서 두 백화점과 중앙시장이 사라진다면 대구의 소중한 기억도 지워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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