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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듬뿍·추억 가득! 경북 전통시장] (26)칠곡군 왜관시장조선후기, 일제 강점기 왜관나루터는 일본 상선 드나들던 무역항
조선 후기-일제강점기 이후 일본 상인들이 대거 칠곡으로 몰려들면서 왜관읍은 지역의 상업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한상갑 기자

왜관(倭館)? 일본인들의 공관? 경북 칠곡군 왜관을 떠올리면 떠오르는 의문이 하나있다.

반일(反日) 정서가 강한 한국에서 어떻게 이런 지명이 존속할 수 있었을까.(삼천포나 이리처럼 지명을 바꿔 달라고 주민들이 민원을 제기할 만도하다) 여기에는 왜관이란 지명을 거리낌 없이 수용한 지역민들의 정서가 전제되었을 것이다.

무얼까? 왜색이 짙은 지명이 지역에서 뿌리를 내린 이유. 그것은 아마 조선 후기부터 칠곡에 들어오기 시작한 일본 새상품, 신문물에 대한 주민들의 저항이 없었고, 또 경북 내륙 소도시가 낙동강을 통해 해외로 통하는 것을 환영했다는 의미일 것이다.

본래 ‘왜관’이란 조선시대 한국에 설립된 일종의 주한(駐韓) 거류민들의 통상기관이자 공관(公館) 성격이다.(당나라 신라방처럼)

고려말부터 대마도를 근거지로 한 왜구들의 노략질은 조선 정부의 골칫거리였다. 조선초기 왜구들의 침범이 심해지자 정부는 이에 대한 회유책으로 서울, 부산, 낙동강 유역에 왜관을 설치하고 무역길을 터주었다. 이에 따라 낙동강 유역엔 약목의 관호동과 왜관면 금산리 두 곳에 일본 사신들의 숙소인 소왜관(小倭館)이 설치되었다.

칠곡에 왜관이 설치된 것은 두말할 것 없이 수운(水運)의 편의성 때문이었다. 한반도 남부를 관통해서 흐르는 낙동강은 부산과 영남 내륙을 잇는 최고의 교통수단이었다. 도로교통이 발달 하지 않았던 시절 강을 통한 수운은 대단위 화물을 수송하는데 유용한 수단이었다.

칠곡은 경상도 내륙의 농산물, 임산물, 광물이 집중되었고 모인 물자는 낙동강을 통해 부산으로 내려갔고 일부는 일본으로 수출되었다. 반대로 일본에서 건너온 물자들은 부산의 해산물과 함께 왜관에서 풀려 경상도 지역에서 거래 되거나 영남대로를 거쳐 서울로 수송 되었다.

◆왜관나루터는 한 때 일본 무역선 드나들던 무역항=지금은 한적한 강변마을로 변했지만 한말의 약목과 금산리 일대는 부산의 상선(商船), 일본의 무역배가 드나들던 무역항이었다.

이런 수로(水路), 교통의 편의성 덕에 칠곡엔 조선후기부터 시장이 들어섰다. 조선 후기 역사서인 ‘동국문헌비고’에 보면 칠곡지역엔 남창장(4, 9일), 우암장(1, 6일), 팔거장(5, 10일), 상지장(3, 8일), 매원장(1, 6일)이 섰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 중 현 왜관시장의 모태가 된 것은 매원장이었다. 왜관 중심부에 위치했던 매원장엔 조선 후기-일제강점기 이후 일본 상인들이 대거 몰려들었다. 

왜상들은 부산과 낙동강 수로를 통해 공업 생산품을 실어날랐고, 사문진나루터, 강창나루터, 왜관나루터 등은 주요 교역, 무역 기지로 작용했다.

이들은 앞서 왜상들이 머물던 공관과 숙소가 있던 시장 일대에 자리를 잡으면서 왜관읍은 칠곡의 상업 중심지로 떠오르게 된다.

1905년에 개통된 경부선과 왜관역 개점도 상업도시 왜관에 날개를 달아준 ‘사건’이었다. 철도 개통이후 왜관은 육로, 물길을 모두 갖춘 물류도시, 무역도시로 성장을 거듭해 갔다. 이런 위세에 힘입어 1950년엔 우시장까지 들어서면서 영남 내륙의 상업도시로 도약할 수 있었다.

이후 왜관은 한국전쟁 이후에도 전후 복구사업을 위한 대규모 토목공사가 진행되면서 시장의 규모를 유지했고, 1970년 경부고속도로와 왜관 IC가 생기면서 교통도시, 상업도시의 전통을 이어 갈 수 있었다.

왜관시장 내부. 한상갑 기자

◆경부선 철도 들어선 후 낙동강 수운체계 몰락=왜관에 현대적 의미의 상설시장이 들어서는 건 1976년도. 이 시기 왜관역 일대를 배경으로 4,367㎡에 이르는 대규모 상가건물이 들어섰다. 120여개의 점포로 시작한 시장은 현재 약 200여개 점포 대규모 시장으로 성장했다.

한때 대일(對日) 무역항이 들어설 정도로 번창했던 왜관은 차츰 침체의 길로 접어들게 된다.

우선 경부선의 개통은 일본-부산과 낙동강을 있던 수운(水運) 시스템을 하루아침에 무너뜨려 버렸다. 간편하고 값싸며 대량 적재가 가능한 열차가 등장하면서 낙동강의 바지선, 상선, 나룻배들은 포구의 뒷전으로 물러나야 했다.

나루터의 몰락은 낙동강을 따라 이어지는 석적, 강창, 화원나루터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나루터를 기반으로 영업을 펼치던 주막, 숙소, 포구 장터들도 급격히 세를 잃어갔다 .

앞서 언급한 경부선의 개통도 1930~70년대까지 상업도시 왜관을 든든히 받쳐준 배경이 되었지만 이 역시 장기적으로 왜관 경제에 독으로 작용했다. 대규모 철도, 고속도로가 대도시와 대도시를 있고, 전국이 1일, 반나절 생활권으로 좁혀지면서 모든 경제활동의 중심은 대도시나 일부 공업도시로 옮겨갔기 때문이다.

진땡이국밥집 순대와 수육.

◆진땡이국밥집 등 맛집, 장꾼들 시장기 달래줘=조선 후기부터 이름을 올린 왜관시장은 아직도 전통과 역사를 이어오고 있다. 인근 칠곡, 구미, 왜관 등에 대단위 아파트 단지가 들어서 상권의 배후가 든든하고 또 조선시대부터 이어져오는 오일장이 전통이 잘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일단 외지에서 온 관광객들은 읍(邑) 단위를 훨씬 넘어서는 시장에 규모의 놀란다.

주변에 논밭, 임야가 잘 갖춰진 지역 특성답게 왜관시장에는 과일, 채소 등 청과시장이 잘 발달해 있다. 특히 칠곡의 명물인 오이, 벌꿀, 참외, 한우 등은 대단위 도매시장이 펼쳐질 정도로 활성화 되어 있다.

시장에서 만난 한 노점상은 “왜관은 낙동강을 끼고 있고 사질토, 범람지가 많아 오이 재배에 최적화된 토양을 갖추고 있다”며 “금남리 일대는 온통 오이하우스가 들어서 장관을 연출한다”고 말했다. 특히 1, 6일에 펼쳐지는 5일장에는 구미, 칠곡, 성주는 물론 대구에서도 관광객들이 쇼핑을 올 정도로 붐빈다.

왜관시장엔 쇠고기, 보양탕, 국밥집 등 맛집들이 장꾼들의 시장기를 책임진다. 이중 셀럽은 단연 80년 전통에 3대 가업을 이어 오고 있다는 ‘진땡이국밥집’이다.

이 집의 비결은 24시간 끓여 만든 육수. 가스불 대신에 은은한 연탄불을 쓰며 암퇘지, 머릿고기, 내장을 주로 쓴다. 식당 앞에서 고기를 쓸던 젊은 주인은 “국밥에 들어간 순대는 모두 수제로 만드는 데 잘 손질된 곱창에 선지, 당면, 야채를 듬뿍 넣어 끓여낸다”고 말한다.

장날이나 주말에는 10개 테이블을 풀(Full)로 돌려도 20~30분 대기는 기본. 이 집의 비법은 쌀밥을 육수에 미리 토렴해 식감을 최고로 높였다는 점. 덕분에 육수와 밥과 고기가 잘 섞여 항상 최적의 조합을 유지한다.

고기가 넉넉해 따로 수육을 시키지 않아도 반주를 곁들일 수 있다. 다대기에 새우젓을 듬뿍 넣으면 잡내를 완벽하게 잡을뿐 아니라 얼큰한 국물 맛을 연출할 수 있다. 국밥 한 그릇에 6,500원, 막걸리 한 병 2,500원으로 단돈 9천원이면 술과 식사, 요리를 한꺼번에 해결할 수 있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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