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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듬뿍·추억 가득! 경북 전통시장] (27)낙동강 나루터구미·왜관·고령엔 나루터 20곳 성업...소금배·무역선 연중 북적
사문진 나루터 모습. 조선 세종 때는 왜물고(倭物庫)가 설치를 정도로 경상도-대구-일본간 주요 무역기지로 기능했다고 한다.

대구경북 전통 시장 역사와 관련해 낙동강의 중요성은 아무리 강조해도 지나치지 않다. 도로, 교량이 미흡했던 시절 대부분의 물자 수송은 물길을 통해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대구 고대사에서 문명의 전파, 이동 경로를 조사할 때도 낙동강은 늘 중심에 있었다. 4~5세기 조성된 불로동고분군에서는 남해에서 올라온 상어, 고래 고기, 정어리 등 해산물 흔적이 발견됐다. 고대에 이미 대구와 부산을 연결하는 수상 네트워크가 존재했었다는 증거다.

1993년 북구 팔달동고분군에서 발견된 납작도끼(板狀鐵斧)도 강을 통한 문명 교류를 밝히는데 획기적인 단서다. 동일 양식의 철기가 일본에서 대량으로 발견된 것으로 보아 강을 통한 문명 교류는 멀리 해외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동력선도 없던 고대국가 시절 이런 국제간 교류가 가능했을까, 의문을 품어 볼만하지만 고고학적 발굴이나 인류학적 성과들은 이것이 ‘사실’(史實)이라고 말해주고 있다.

강을 통한 문명의 교류와 상업적 수송의 흔적은 낙동강변 나루터에서 잘 나타난다. 낙동강나루터와 관련된 기록은 이미 삼국사기 등 고대 문헌에서 심심찮게 등장한다.

삼국사기에 ‘소지왕 9년(487) 신라가 삼한시대부터 이어져온 동안진(東安津)에 역원(驛院)을 정비’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동안진은 지금의 성주나루로 비정 되고 진(津)과 역(驛)을 정비했다는 것으로 보아 대단위 나루터와 공적 객사시설이 이 지역에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또 삼국사기에 ‘가혜진’(加兮津, 가혜진은 고령군의 개포리로 비정) 기록도 나타나는데, 이 역시 고대 낙동강에 나루터의 존재를 입증할 단서다.

◆대구-고령-성주 구간에 나루터 20여곳 설치=영남 내륙을 남북으로 관통해서 흐르는 낙동강의 구미-대구-부산 구간은 옛부터 영남 물류의 동맥이었다. 한말 이 구간엔 100여 개의 나루터가 있었다고 전하며 대구경북의 구미, 왜관, 대구, 고령, 성주, 구간에도 20여 곳 이상 나루터가 성업 했다고 한다.

이들 나루터들은 구미-대구-창녕-부산을 물류 라인으로 촘촘하게 연결하고 있는데, 이 수상 루트를 따라 남해 해산물과 부산에 유입된 외국 상품이 영남 내륙으로 운반되었고 대구경북의 농산물, 수공품, 여객이 남해로 진출했다. 

각 지역의 나루터들은 이 수송품을 조창(漕倉)에 보관하고 장터를 열어 유통시켰는데, 이 때문에 각 나루터에는 주막과 장터, 객사가 성업 했다. 조창, 세곡창, 왜물고(倭物庫) 같은 창고가 발달했으며 인근에는 우시장, 정미소, 사기장 같은 상업, 생산 시설들이 들어서기도 했다.

구미-대구-부산에 이르는 낙동강이 전통시대 영남 물류의 동맥으로 작용했다면, 각 지역의 나루터들은 마을과 마을 지역의 상권과 상권을 이어주는 상업, 물류기지였다.  즉 나루터들은 도시간의 대단위 물류, 수송 기지인 동시에 마을과 마을을 있는 교통수단이자 유통 수단이기도 했다.
도로가 발달 하지 않았던 시절 나루터는 지역 농산물과 여객은 물론 버스, 소달구지, 화물트럭까지 실어 날라야 했으니 지역의 나루터들은 유통, 교통시설을 넘어 상업, 산업시설 기능까지 수행해야 했다.

고령 개포나루터 현재 모습.

◆철도, 교량 등장이후 나루터들은 역사의 뒤안길로=청동기가 강하고 날카로운 철검(鐵劍)에게 문명을 내어 주듯 교통수단도 과학, 산업시설의 발달로 자연스럽게 세대교체 과정을 밟아갔다.
고대부터 한말, 전통시대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중요한 유통 수단으로 자리 잡았던 배, 나루터를 역사의 뒤안길로 내몬 것은 철도였다.
철도가 생기면서 24시간 수송이 가능해졌고, 그 속도와 비용은 종전 방식의 반(半)에 반만 투입해도 될 정도로 충분한 경제성을 확보했다. 기관(機關)의 힘을 빌리면서 40~50량(輛)씩 대용량 수송이 가능해지자 화주(貨主)들은 더 이상 고비용, 저효율인 나루터를 찾지 않게 되었다.
1907년 경부선 등장 이후 낙동강의 나루터는 소금배나 소규모 잡화, 농산물 배만 한가로이 오가는 장소로 위상이 격하되었다. 마을과 마을을 잇던 나루터 기능도 1960~70년대 교량들이 들어서자 용도폐기의 길로 접어들었다.

◆낙동강 유역의 여러 나루터들

▶왜관 강정나루터=칠곡군 기산면 죽전리에 있던 나루터다. 전통시대 성주와 기산 지방에서 생산된 농산물을 주로 실어 날랐다. 당시 왜관나루터 언덕엔 경북도에서 제일 큰 ‘남일정미소’가 있었는데 성주, 칠곡 등 주변에서 운송된 곡식을 주로 도정했다. 장날이면 전국에서 모여든 쌀장수들이 흥정을 벌이느라 동네가 소란스러웠다고 한다. 1939년 경부선이 복선화 되기 전까지 강정나루는 왜관과 성주, 칠곡을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다. 당시 장날에는 배에 소달구지, 버스 화물트럭과 사람들이 함께 실려 운송되는 진풍경이 연출되기도 했다.

▶사문진 나루터=고령군 다산면 호촌리에 있던 나루터다. 조선시대 경상도 관아 대구부(大邱府)로 유입되는 관물(官物), 공물의 집산지였다. 세종~성종대 국가 조세 창고인 화원창(花園倉)이 들어설 정도로 물류, 조세에 중요 시설로 자리매김했다. 조선 세종 때는 왜물고(倭物庫)가 설치될 정도로 경상도-대구-일본간 주요 무역기지로 기능했다. 8·15 광복 후까지도 부산 구포에서 경상북도 안동 사이를 오르내리는 낙동강 수운(水運)의 중간 기착지로 작용했다. 고령군 다산면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들이 이곳을 통해 대구 전통시장에 판매되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두척의 배가 하루 70회식 오갔다는 기록으로 봐 이 곳 물동량의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고령군 도동나루터=고령군 개진면 구곡리에 있던 나루터. 고령과 현풍의 여객과 화물의 왕래를 위한 시설로 고령의 수박, 참외 등 농산물이 이곳을 거쳐 현풍장이나 논공으로 이동했다. 나무 옆에 주막이 있었는데 나루터를 왕래하는 손님들이 많아 크게 번창 했다고 한다. 1905년 경부선 개통 후 도동나루로 들어오던 대구, 창녕, 부산의 화물들이 모두 철도편으로 옮겨가면서 시설은 유명무실화 되었다. 현재 도동나루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고 나루터가 있던 뒤쪽으로 도동서원이 자리하고 있다.

▶고령군 개포나루터=고령군 개진면 개포리에 있던 나루터. 삼국사기에 ‘가혜진’(加兮津) 기록이 등장할 정도로 오랜 역사를 자랑한다. 고대부터 수로가 발달해 인근 나루터 중 가장 큰 규모를 자랑했다. 강화도에서 제작된 팔만대장경이 해인사로 옮겨질 때 하역한 나루터로 유명하다. 당시 장경(藏經)들은 서해-남해를 거쳐 낙동강을 거슬러 올라 왔는데 이 당시(고려)부터 남해-낙동강-영남 내륙에 이르는 미곡, 소금, 해산물 물류망이 형성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하루 종일 곡식과 소금을 실어 나르는 배들이 수십척씩 오갔고 주변에 창망(倉望)이라는 큰 창고가 있어 하역한 물품들을 보관했다고 한다. 개포나루터에서 유통된 소금은 고령뿐 아니라 합천, 성주, 거창, 김천 일대까지 부려질 정도로 큰 규모였다.

1975년 상주 낙동나루터 모습.

▶성주 동안나루터=현 성주대교와 제2선원교 중간 지점에 위치했던 나루터다. 삼한시대부터 ‘동안진’(東安津) 이라는 지명이 전할 정도로 역사를 자랑한다. 동안나루는 고려 성종(992년) 때 세곡미의 원활한 수송을 위해 조창(漕倉)을 설치했을 정도로 규모를 자랑했다. 성주, 고령, 화원 일대 주민, 상인들이 나루터를 이용해 여객, 상업활동을 펼쳤다. 동안진의 조창인 동안창(東安倉)은 마을 사이 교역 외에도 고려시대부터 마산합포와 안동창 사이에서 수운의 보조창고로 역할을 담당했다. 삼한시대부터 전통을 이 전통을 이어 오던 동안나루는 1970년대 성주대교가 건설되면서 점차 기능을 잃어갔고 이젠 그 흔적마저 사라졌다.

▶구미 비산나루=구미 비산동과 양포동 사이 낙동강을 연결하던 나루터다. 부산에 해산물과 서해에서 들어온 소금배가 정박할 정도 규모를 자랑했다. 소금이 들어오는 날에는 밤까지 불야성을 이룰 정도로 장터가 성행했다. 특히 나루터 시장이 번창해 장터에서는 구미, 성주, 고령 일대의 농산물과 부산의 수산물, 서해의 소금이 불티나게 팔려 나갔다고 한다. 나루터 인근엔 사기점, 옹기점이 있어 여기서 만든 수공품이 남해, 서해 등지로 팔려나갔다. 2005년 산호대교가 건설되면서 나루터는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나루터의 마지막 사공인 진용석 씨에 의하면 1985년까지 부근에 공단근로자, 학생, 주민들이 나루터를 이용했다고 한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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