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에 돌아 본 번개시장 모습. 옛날 '방티 아지매'들의 치열한 삶의 현장이었던 주출입구엔 구제옷 점포들이 들어서 있다. 한상갑 기자

번개시장은 ‘번개처럼 재빠르게 장을 마감한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라고 한다. 영어 표현은 ‘Lightening Market’쯤 될까. 묘한 긴장감을 주는 명칭과 달리 기원과 취지는 매우 서민적이고 정적(情的)이다.

주로 대도시 근교 농민들이 직접 경작한 농산물을 새벽기차를 타고와 재빨리 처분한 후 철수하는 방식의 거래라고 해서 이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주로 농촌에서 많이 행해졌지만 강원도 삼척처럼 밤새 잡은 수산물을 새벽시장에 와서 파는 ‘어촌형 번개시장’도 있다.

번개시장의 유래와 규모에 있어서 대구 번개시장도 전국구급 반열에 올라 있다. 경부선 대구역 부근 태평로 1가에 위치한 번개시장은 한때 삼척번개시장, 울산번개시장, 춘천번개시장, 마산역번개시장과 함께 전국 ‘빅5급’ 규모를 자랑했다.

이름은 ‘반짝시장’ ‘도깨비시장’ ‘번개시장’처럼 기괴(?)하게 불렸지만 이곳은 민초들의 생활경제 현장이었고, 그 속엔 서민들의 치열한 삶이 녹아 있었다. 새벽기차 기적소리로 장이 서고 아침 해로 장을 마감한다는 태평로 번개시장을 돌아보았다.

도로변 노점들 모습.

◆1970-80년대 대구역에 농산물 새벽시장 형성=태평로에 언제부터 새벽시장이 들어섰는지 확실하지 않다. 일부 책자에는 경부선이 개통된 1905년도까지 역사를 소급하는 곳도 있고, 전통시장이 본격적으로 활성화되기 시작한 1970년대를 기원으로 보는 설도 있다.

1981년 1월 18일자 조선일보에는 당시 대구역 주변에서 열렸던 번개시장 이야기가 등장한다.

기사엔 ‘새벽에 번개처럼 장이 서고, 번개처럼 물건이 팔리며, 해가 높이 뜨기 전에 번개처럼 장이 끝나버려 번개시장이라고 불렀다’고 나와 있다. 아마 이 무렵부터 번개시장이라는 존재가 시민에게 알려지고, 대중적인 상(商)행위 공간으로 인식되기 시작한 것이 아닌가한다.

그러나 시장의 시작은 어느 한순간에 공식화되는 것이 아니고, 자연 발생적으로 형성되는 것이기 때문에 시장의 기원에 큰 의미를 부여할 필요는 없는 것 같다.

앞서 언급했듯 시장의 출발은 경산, 청도, 김천, 구미, 왜관 등 경부선 노선 지역에서 농부들이 수확한 농산물을 새벽에 가져다 판 것이 시초였다.

번개시장이 농산물 집산지로 유명하게 된 이유는 위에 나와있 듯 바로 경부선 철도 덕이었다. 지금처럼 농산물 유통 출하가 현대화, 활성화되지 않았던 1970-90년대엔 수확한 농산물은 농민들이 직접 내다 팔아야 했다. 농민들에게 유동인구가 많고, 지리적으로 가까웠던 대구역은 최고의 포인트였다. 직접 생산한 채소, 과일을 새벽에 바로 가져오기 때문에 ‘번개시장 농산물은 값도 싸고 품질도 뛰어나다’는 신뢰가 쌓인 것도 시장이 번창한 이유였다.

번개시장은 백화점과의 동거로 유명하다. 바로 뒤에 보이는 흰색 건물이 롯대백화점대구점.

◆백화점과의 공생으로 전국적으로 주목=새벽 노점 형태로 시작한 태평로 번개시장은 1988년도 상가건물이 들어서며 노점과 상가형 전통시장이 공존하는 체제로 운영되기 시작한다.

현대식 상가가 들어서며 시민들 입장에서는 산뜻한 공간에서 쇼핑을 즐길 수 있어 크게 반겼지만, 한편으로는 노점과, 상가 건물주, 지주 사이 갈등이 벌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2020년 11월 중구청은 태평로 일대 불법 노점상에 대한 행정대집행을 진행하며 마찰을 빚은 바 있다.

노점상 입장에서는 수십 년씩 장사를 해오던 공간을 내주어야 할 판이지만, 여기엔 ‘상상(商商) 갈등’ 외 불법 점유 같은 법적인 분쟁, 지주와의 갈등, 환경오염 같은 문제까지 겹쳐 해결이 쉽지 않다고 한다.

한편 번개시장은 또 다른 쇼핑 시설인 롯데백화점과의 ‘동거’로도 유명하다.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두 유통공간이 공존하고 있는 셈인데 뜻밖에 큰 갈등은 나타나고 있지 않다고 한다.

전통적인 쇼핑 공간인 장터와 현대적 쇼핑 장소 백화점이 양립하면서 갈등이 생기지 않는 것은 아이템이 겹치지 않아서일 것이다. 즉 백화점에서 공산품, 럭셔리 상품을 취급한다면 시장에선 농산물 등 생필품을 주로 거래하기 때문에 공생이 가능한 것이다.

상가시장 내부 모습. 방앗간과 참기름집이 많은 것이 특징이다. 옛날 이곳이 깨, 콩, 고추 등의 집산였음을 알 수 있다.

◆2000년대 이후 새벽시장 노점 점차 사라져=1970년대 후반 언론 보도 사진을 보면 대구역에서 통근열차를 타고 인근 아주머니들이 급하게 번개시장으로 달려가는 모습이 보인다. ‘방티’(함지박)를 인 아지매들이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급히 계단을 내려오는 모습에서 당시 노점상들이 치열했던 삶이 그려진다.

이 아낙네들은 새벽 첫차를 타고 와서 급히 짐을 부리고 11시까지 물건을 팔고는 다시 열차를 타고 귀가길에 오르는 숨가쁜 삶을 반복했다. 집으로 돌아간 이 아낙네들을 기다리고 있는 건 수많은 가사(家事) 노동과 또 내일 팔고 나올 농작물을 장만하는 일들이었을 것이다.

얼마 전 새벽에 번개시장을 돌아보았다. 내심 20-30년 전의 활기찬 노점들의 시장 모습을 기대했지만 현실은 정반대였다.

이제 옛날 시골 아낙네들의 정겨운 시장 정담(情談)이나 억척스런 흥정 소리는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 1970-80년대 그 아낙네들이 대부분 고령으로 은퇴하거나 돌아가시면서 명맥이 끊겼고, 이후 급속한 이농(離農), 인구 감소로 농촌 실정이 예전 같지 않기 때문이다.

지방에도 대형마트, 농협연쇄점 같은 현대적인 유통시설이 들어서면서 굳이 대도시까지 나오지 않아도 생필품을 구매할 수 있게 된 것도 대도시 번개시장의 중요한 이유였다.

◆‘방티 아지매’ 노점 자리엔 구제옷 가게들만 북적=현재 노점들은 시장 안쪽도로를 따라 도로변에 가건물 형태로 영업을 하고 있고, 상가 건물 내엔 점포 130여 곳이 장사를 하고 있다. 노점에서는 대부분 야채, 생선, 잡곡 등 식료, 생필품들을 주로 취급한다.

그러나 최근 구제옷 점포들이 급증하며 시장 판도가 바뀌고 있었다. 이미 열 곳 중 1~2곳은 이미 구제옷 가게들이 점령(?)하고 있었다.

상가의 동쪽엔 농협태평로공판장이 자리 잡고 있다. 여기엔 과일 중도매인 점포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낮엔 소매 판매도 한다. 가격표를 살짝 보았는데 큰 사과 하나 가격이 500원 정도에 매겨져 있었다.

시장 안쪽으로 들어가면 본격적으로 상가 시장이 펼쳐진다. 전형적인 재래시장 형태를 하고 있고 취급품도 식육, 생선, 떡집, 분식 등 큰 차별화 요인은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눈에 띈 점은 참기름집, 고추 방앗간이 유독 많았다는 점. 대략 세봐도 열 곳이 넘는 것 같았다. 옛날 번개시장이 콩, 깨, 고추 등의 집산지였던 전통이 남아 있는 듯했다.

한 방앗간의 주인은 “옛날 시장에 모인 깨, 콩, 고추는 바로 옆 방앗간 기름집에서 즉석에서 가공되었다”며 “소비자들은 현장에서 원재료를 직접 골라 기름과 고춧가루를 만들어갔으니 제품에 대한 만족도가 높았다”고 설명했다.

오랜만에 번개시장에서 그 시절 ‘방티 아지매들’을 볼 수 없어서 서운했다. 그러나 현대 유통시설의 총아라는 백화점 바로 뒤에 전통시장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무척 흥미로웠다.

세상은 오직 디지털화를 향해 바쁘게 달려가는데, 이곳 아날로그적 공간에서는 시간이 멈춘 듯 더디게 흘러가고 있었다. 변하지 않은 건 바로 시장 뒤편을 바쁘게 오가는 철도의 굉음소리뿐.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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