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평에 다방특구를 만들자’는 실언으로 단체장을 곤란에 처하게 했던 해평장터의 다방들. 한때 30여 곳이 성업했지만 이제 상당수가 문을 닫고 수확철에는 반짝 영업을 하는 형태로 변모했다. 한상갑 기자

구미 북동쪽에 위치한 해평면은 조선시대 국립 여관인 원(院)과 상인들의 숙소인 객사(客舍)가 설치 될 정도로 행정과 교통, 상업의 중심지였다. 1970년대만 해도 장날이면 쇠전에 소울음 소리로 가득 찼다고 한다.
낙동강 동안(東岸) 평야지대에 자리 잡은 해평은 이름처럼 ‘바다(海) 같이 펼쳐진 드넓은 평야(平)’를 펼쳐놓고 있다. 삼국시대, 고려시대에는 이웃의 안동이나 선산이 서로 속현(屬縣)으로 편입하려고 공을 들인 지역이다.
해평장 취재를 앞두고 자료 수집을 하던 중에 재미있는 기사가 하나 눈에 띄었다. 모 자치단체장이 주민간담회에서 ‘구미공단을 모두 팔아서 해평면을 다방특구로 만들자’라는 발언을 해 구설에 휘말렸다는 보도였다. 해평에 한때 다방이 성행했으니 도시 재생 차원에서 특구를 조성해보자는 농담이었다고 는데, 선뜻 이해가 안되었다. 그 실마리를 찾아 구미로 향했다.

◆낙동강 중류에서 상업, 교통, 행정 중심지로
서두에서 해평을 ‘선산과 안동 사이에서 중심축 역할을 했던 지역’이라고 소개를 했지만 해평이 낙동강 남부의 핵심으로 떠오른 것은 5~6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해평면 낙산리에는 사적 336호인 낙산리고분군이 있다. 대형분과 중소형분을 합쳐 약 200여 기가 분포한다. 역사학자들은 금제귀고리, 유리구슬 등 부장품으로 보아 구미, 선산 지역 최고 수장급이 축조한 무덤으로 보고 있다.
고려시대 해평은 문익점의 목화와 관련하여 인연을 이어간다. 문익점의 손자인 문래(文萊)는 목화씨를 뽑는 물레를 만들었다. 문래 동생인 문영(文英)은 해평에 자리를 잡고 베짜기에 몰두하다 베틀을 만들었고 마침내 ‘문영베’를 짜는데 성공했다. 이런 연고로 해평면에는 ‘베틀산’과 ‘베틀 석굴’ 같은 지명이 전설과 함께 회자된다.
해평이 낙동강의 상업, 행정 중심지로 부상한 것은 조선 후기부터이다. 임진왜란을 전후해 객주가 들어설 정도 상업의 중심지였고, 일제강점기엔 일찌감치 정기시장이 섰다. 특히 해평 우시장은 전국적으로도 널리 알려졌고, 장 날 하루 거래량이 200~300마리에 이를 정도로 규모를 자랑했다.
광복 이후에도 해평장은 더 번성 했다. 장날이면 신작로가 막힐 정도로 장꾼들과 주민들의 행렬이 줄을 이었고, 인근 고아읍 강정나루에서는 나룻배들이 소와 곡식을 해평장으로 실어 나르느라 진풍경을 연출했다고 한다.
1920년대 초 이미 정기시장이 들어선 해평은 1959년 공설시장으로 인가를 받게 된다. 그렇게 번창했던 우시장은 1980년대 이후 영농 기계화가 시작되면서 가축이 필요 없게 되자 소들도 점점 자취를 감추었다.
우시장의 빈자리를 대신한 것은 해평들에서 경작된 풍부한 농산물 들이었다. 금오산청결미, 해평청결미, 흑두루미쌀들이 싸전을 채웠고, 철따라 재배되는 수박, 참외, 땅콩, 고추, 마늘 등 농산물이 야채전을 덮었다.

조선시대 역원(驛院)과 객주가 들어서고 1970년대 우시장이 번성했던 해평장은 이제 농촌인구 감소와 대형마트의 등장으로 급속히 쇠락하고 있다.

한때 다방 30여곳 성업, 지금은 점점 쇠퇴...수확철만 반짝

◆장터 탐방=4, 9장이 열리던 지난 9일 해평 오일장 취재에 나섰다. 이번 취재 목적은 전국 규모의 장꾼들이 몰렸다는 옛 우시장의 흔적을 찾는 일. 강정나루를 건너 온 수백마리의 소떼들이 몰려든 장터 풍경과 주막에서 장꾼들이 흥청거리던 현장을 찾는 일은 상상만으로 흥분이 되는 일이었다. 또 낙동강 중류의 한 복판에서 물류와 상업, 교통의 중심 역할을 했던 해평의 위용을 확인하는 일도 흥미로운 과제였다.
그러나 막상 해평장 입구에서 취재진을 맞은 건 텅 빈 시장과 합쳐서 5개가 될까 말까한 노점이 전부였다. 혹시 5일장을 잘못 알았나 확인하기 위해 한 주민에게 물었더니 충격적인 답변이 돌아왔다. 해평시장은 이미 오일장으로서 기능을 잃었다는 것. 인구 1만 명이 유지되던 10년 전에는 그나마 장도 서고 제법 인파도 몰렸지만 지금은 장(場)이라는 개념 자체가 사라졌다는 것이다.
고춧가루를 빻던 한 방앗간 주인도 “5년 전만 해도 장날이면 30여명의 외부 상인들이 와서 노점을 펼쳐 그런대로 장날 분위기가 났지만 인구가 줄고, 상권이 위축되면서 이들의 발길이 끊어진지 오래”라고 말한다. 실제로 50여 곳 전체 상가 중 영업을 하는 곳은 대로변의 식당가의 일부고, 옛날 장터가 열렸던 장옥 쪽에는 대부분 문이 닫겨 있었다.
사라져 가는 한 시골 장터에서 취재진을 더 혼돈스럽게 한 것은 바로 문제의 그 ‘다방’들이었다. 옛 장터를 따라 늘어선 상가엔 두세 점포 건너 하나씩 다방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해평면 전화번호부에만 다방이름이 26곳이 나오는데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은 듯 했다. 그런데 소문과 달리 점포들은 남루했고 태반은 문이 닫혀 있었다.

해평장이 오일장 가능을 상실하면서 장터는 주차장으로 변했다. 이제 해평의 상권은 도로변 큰길가로 집중하고 있다.

어렵사리 한 다방을 찾아들어가 다방촌의 내력에 대해 들을 수 있었다. 해평장이 번성하던 1980년 해평엔 이렇다 할 술집이나 유흥문화가 없었기 때문에 다방들이 이런 ‘수요’를 음성적으로 해결했다고 한다. 또 옛날 전성시대 해평장의 낭만과 풍요를 기억하는 어르신들에게 해평 장터는 추억과 낭만, 유흥의 장소로 제격이었던 것.
한 주민은 “5년 전만 해도 벼, 양파, 수박, 참외, 고추 등 수확 철이면 해평 다방도 제법 활기가 돌았다”며 “수매를 마친 농민들이 주막에서 한 잔 씩하고 흥이 오르면 다방에 와서 2차를 하는 그런 문화였다”고 회상했다. 한때 해평장 다방이 ‘화끈한 서비스’로 소문이 나면서 왜관이나 선산 쪽에서 일부러 원정을 오기도 하고 구미 시내의 젊은층들도 호기심에 몰려들었다고 한다.
다방 주인은 “다방이 30개면 많을 것 같지만 해평면에 리(里)가 24개가 있고, 이 마을에서 한 두 팀만 나와도 다방이 순식간에 꽉 차게 된다”며 “당시엔 일하는 여종업원들도 모두 300~400만 원씩 벌어 갈 정도로 경기가 좋았다”고 말했다.
요즘은 거의 휴업 상태로 있다가 농작물 수확 철에만 반짝 다방이 열리는데 이마저도 손님이 눈에 띄게 줄었다. 10년 새 해평면 인구가 절반으로 줄었기 때문이다.
자치단체장을 곤경에 몰아넣었던 ‘말실수’도 사실은 옛날 다방이 반짝 할 때를 배경으로 한 것이었다. 시민들은 “사라져 가는 농촌의 다방을 부활시켜 성매매 집결지로 만들려고 하느냐”며 발끈했지만 이젠 이마저도 사치가 돼버렸다. 30여개 다방이 다닥다닥 붙어 불야성을 이루던 그 시절은 이제 추억 속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사실 장터는 그대로 있었지만 그 위로 세월이 바쁘게 흘러간 것 뿐이다.
조선시대 역원(驛院)터에서, 영남 내륙 물류의 집산지로 번성하던 해평은 이제 녹슨 간판처럼 세월 속으로 쇠락해가고 있다. 10년 후 해평엔 어떤 역사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을까.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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