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염매시장은 일제강점기, 6·25 한국전쟁을 거치는 동안 시민들과 애환을 함께하며 도심 시장으로 명맥을 이어왔다.

대구 염매시장의 성쇠는 종로 골목의 역사와 궤를 같이 해왔다. 종을 치는 종루(鐘樓)를 의미하는 종로는 조선 후기 대구 행정의 중심지였다. 대구읍성 시대 종로는 현재 골목은 물론 달서문(서성로 옛 조흥은행 앞), 경상감영공원까지 포함하고 있었다.
1911년 일제는 행정구역을 개편하며 종로를 ‘교마치’(京町)로 불렀다. 도회, 거리를 뜻하는 정(町)은 지금으로 치면 시(市)나 구(區)의 행정 단위쯤 된다.
일제강점기 대구 최대 번화가는 종로·북성로였다. 화려한 미나카이(三中井) 백화점과 일본식 건물들이 줄지어 있던 종로 일대는 대구의 긴좌(銀座)로 불렸다.
종로가 대구 경제, 행정의 중심으로 번창해 갈 때, 도심 생필품, 식료품, 물산의 공급처로 시장이 필요했고 염매시장은 그 대안이었다.

◆약령시와 함께 대구 도심 상권을 형성하던 염매시장은 한국전쟁 발발 이후 피난민들이 몰려오면서 전시(戰時)시장이 열리게 됐다.
피난민들은 처음에는 인근 상인들을 대상으로 떡행상, 좌판을 열었다. 장세(場勢)가 커지자 떡전골목으로 자리를 굳혔고 시민들에게 인기를 끌면서 1960년대 동아쇼핑 서쪽에서 상점으로 발전했다. 지금도 대구시민들에게 혼수, 폐백떡 등 중요한 행사의 특별한 떡은 염매시장에 가서 사는 게 일반적인 일이 되었다.
1970년대까지 300개가 넘는 점포들이 성업 했고 대구에서 신선도가 높고 품질 좋은 식료품들이 유통돼 시내 상인들이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종로를 이야기할 때 기생을 빼놓을 수 없다. 일제강점기 이후 경상감영과 대구부가 해체되면서 관기들이 권번(券番)이라는 기생조합으로 편입돼 종로 일대에 자리 잡게 되면서 기생 거리가 형성되었다. 달성관, 동경관 등 40여 개의 요정이 생겨났고 절정기 때는 130~150개에 이르렀다. ‘춘앵각’ 나순경 마담은 대구 요정계 마지막 좌장으로 불렸다.
필자도 춘앵각에 몇 번 초대된 적이 있었는데 마담이 우리를 보고 ‘그놈들 다마 고르다’며 맞아주던 기억이 새롭다.
1970~80년대 염매시장에는 요정, 기생집에서 일하던 찬모(饌母)와 침모(針母)들이 안주, 반찬거리와 한복 수선을 위해 바삐 오가던 생활경제의 현장이었다. 계산동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김원일의 소설 ‘마당 깊은 집’에서 주인공의 어머니 직업도 ‘기생들 옷을 수선하는 일’이었던가.

70여년 역사를 간직한 염매시장 떡집골목.

◆본래 염매시장은 지금 동아쇼핑 자리, 삼성금융프라자 자리가 모두 포함됐던 중형급 도심 시장 이었다.
1984년 동아쇼핑, 1996년 삼성금융프라자가 들어서면서 많은 부지를 잃은 떡전은 성밖골목 등지로 분산되면서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여기에 현대백화점까지 입점하면서 성밖골목의 떡전은 대부분 백화점 부지에 편입됐으며, 점포들은 하나둘씩 종로 쪽으로 밀려났다.
시장에서 만난 한 상인은 “백화점과 대형 건물에 본래 터를 내준 염매시장은 골목을 중심으로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고 말하고 “빌딩들이 염매시장의 70%를 삼켰지만 그래도 끝까지 상권을 지켜나갈 것”이러고 말했다.
쇠락의 길을 걷던 염매시장이 지금 제 2의 부흥기를 맞고 있다. 중구에서 운영 중인 근대골목투어가 인기를 얻고 있는 데다 영남대로 등 주변 정비 작업이 끝나면서 도로와 환경이 눈에 띄게 깨끗해졌기 때문이다.
지금 시장 곳곳엔 생선, 반찬, 강정 같은 전통형 점포 외 커피, 토스트, 부산어묵 같은 신세대 취향의 점포도 많이 생겨 골목투어에 나선 젊은층들의 입맛을 자극하고 있다.
도심 속 서민시장으로 100년 넘게 전통을 이어오고 있는 염매시장은 일제강점기, 6·25한국전쟁, 민주화시기를 거치며 시민들과 애환을 함께 했다.
한때 장꾼들의 흥정소리, 기생들의 웃음소리가 골목을 울리고, 학생들의 뒤를 쫓는 정보형사의 구둣발소리가 골목을 울리기도 했지만 그 때 사람들은 모두 역사 속으로 흩어져 버리고 골목엔 정적만 남아 있다.

곡주사를 운영했던 정옥순 여사.

◆염매시장의 끄트머리에는 막걸릿집 '곡주사'가 있다. 곡주사(哭呪士)는 '곡(哭)을 하며 시대를 저주(呪)하던 선비(士)'들이 모이는 술집의 뜻으로, 유신 독재시절 젊은 학생들과 문화예술인이 시대적 울분을 통음으로 달래던 곳이다.
이 골방에서 이문열 작가, 박기영, 이태수 시인부터 젊은 문인, 학생들까지 막걸리를 호기롭게 돌려가며 마시던 시절이 있었다.
독재 정권 서슬이 퍼렇던 시절 수배중인 학생이 은밀하게 곡주사를 드나들고, 술집 앞엔 ‘요시찰’ 인사의 행방을 찾아 형사들이 진을 쳤다. 얄팍한 주머니에 늘 배가 고팠던 문인, 학생들은 외상술을 대놓고 먹었지만 주인 정옥순 씨는 아는 듯 모르는 듯 채근하지 않았다.
이 때 무전취식을 일삼던 학생들이 ‘떼먹은 술값 팔순상으로 갚는다’며 2013년 정 씨의 팔순잔치를 열어주었던 일화는 유명하다.
잔치를 주도했던 함종호 4·9인혁재단 부이사장은 “형사와 수배자가 술집에서 대치하면 호통을 쳐서 경찰을 내쫓았던 분” 이라며 “민주주의가 질식하던 어두운 시대에 곡주사는 우리들의 도시 속 피난처였다”고 말했다.
날카롭게 술집을 감시하던 형사도, 청년에게 술과 밥을 외상으로 퍼주던 정옥순 여사도 떠나고 없는 지금 술집엔 그 때의 추억을 안주삼아 막걸리를 들이키는 50~60대 손님과, 그냥 한끼 식사를 위해 들어온 젊은 손님들이 뒤섞여 술잔이 공허하게 돌아가고 있을 뿐이다.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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