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미제, 군용품이 넘쳐흘러 양키시장으로 불렸던 대구 교동시장. 한상갑 기자

‘탱크 빼고 다 있다’.
1970~80년대 대구 양키시장은 군용품, 미제 물건의 집산지였다. 츄잉껌, 초콜릿, 꼬냑, 바셀린, 간스메(통조림), 비스킷부터 MRE(전투식량), 워커(군화), 군용담요, 군복, 대검, 야전삽, 수통까지. 상가엔 잡화, 식료품, 군수품이 차고 넘쳤다.
기자의 친구들도 휴가를 나오면 제일 먼저 교동에 들러 ‘마이가리’ 병장 계급장을 붙이고 귀대할 때 원위치 한 후 군번줄, 워커, 깔깔이를 사들고 들어갔다.
대구 교동시장 역사는 잘 알려져 있는 대로 6·25 한국전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국전쟁 당시 교동 일대는 피란민들의 집합지였다. 대구역 좌우로 미군수품 보급창고와 PX가 있었고, 대구시청이 근처에 있어 교동 일대는 전시 교통, 상업, 물류의 중심지였다.
전 교동시장상인회 손경석 회장은 “전쟁통에 사람들이 대구역 주변으로 물려 들자 미군은 천막을 대여해 임시보호소를 만들었다”며 “피란민들은 생계를 위해 자신들이 가져온 보따리를 풀었고 이때부터 전시(戰時)시장이 생겼다”고 말한다.
여기에 양색시나 미군부대 군무원들이 군용품을 시장에 내놓고, 주변 미군부대에서 미제 물건들이 흘러나오면서 양키시장이 본격 형성되었다.
이 양키시장을 ‘도깨비시장’으로도 불렀는데 온갖 잡동사니들이 복잡하게 쌓여있어 이 이름이 붙었다는 설과 단속반이 뜨면 가판의 물건들이 순식간에 사라진다고 해서 유래되었다는 설이 있다.
필자 또래(5060) 세대들에게 교동시장은 중앙파출소나, 대백 뒤 막걸리집이 싫증나면 기분 전환을 위해 ‘원정’을 가는 그런 추억의 장소로 기억된다. 그 때 주로 간 곳이 교동할매빈대떡이나 매일분식, 삼미횟집, 개미분식 같은 곳이었다.
3일 취재를 위해 교동 시장골목을 걷다 군용품 가게가 아직도 성업 중인 것을 보고 새삼 놀랐다. 전쟁이 끝난 지 70년이 넘었는데 아직 군용품 가게가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도 이쪽에 수요가 있음을 뜻한다. 약초꾼들이 실용 목적(고어텍스 군복)으로 방문하거나 아니면 레트로 감성을 느끼고 싶은 장년층이나 밀리터리 마니아들이 고객층인 듯하다.
예전에는 한국군이나 미군이 사용하던 물건들이 음성적으로 유통 되었는데, 요즘은 서울 동대문에서 밀리터리룩이라는 버전으로 합법적으로 제조되어 유통된다고 한다.

교동시장의 대표 음식 중 하나인 납작만두. 부산 당면과 함께 대표적인 전시(戰時) 음식으로 꼽힌다.

‘부산 국제시장에 당면이 있다면 교동시장엔 납작만두가 있다’.
교동시장이 도심 시장으로 사랑받아온 데는 개성 뚜렷한 메뉴들이 있었다. 동아백화점 골목을 지나면 점포마다 순대, 양념어묵, 소라, 오징어전, 빈대떡 같은 음식들이 술에 목마르고 배고픈 청춘들을 유혹했다.
한 음식평론가는 대구 납작만두를 보고 ‘만두라 하면 불만이고, 전(煎)이라 생각하면 행복하다’고 재밌게 품평했다. 당면, 부추 같은 소가 들어갔으니 만두가 분명하고 납작하게 펴서 지져냈으니 전으로 봄집도 한데, 둘 사이에 애매한 경계를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당면, 납작만두 모두 전쟁의 상흔이 밴 전시(戰時)음식들이자 소울 푸드들이다. 긴박했던 전쟁과 배고픈 피난 속에서 간편하게 조리해 배를 채울 수 있는 일종의 즉석요리 들이었다.
밋밋한 맛의 납작만두는 단품으로 먹지 않는다. 보통 화끈한 떡볶이 양념에 적셔먹거나 쫄면을 싸먹는데 이런 게 바로 시너지효과가 아닐까?
기름기 결핍에 허덕이던 시절, 시장에서 허기를 채우던 납작만두가 이젠 당당히 대구 대표 간식거리로 떠올랐다. 웰빙, 다이어트시대를 맞아 칼로리가 많은 육류 만두보다 채식주의에 입각한 납작만두에 열광하고 있으니 음식을 두고 일어나는 이런 반전 또한 흥미롭다.
하루에 수천개씩 팔리는 납작만두는 어디서 만들까. 각자 점포에서 나름의 비법과 노하우로 만들지 않을까 했는데 아니었다. 영남일보 이춘호 기자는 ‘현재 교동납작만두는 칠성시장 내 한 점포에서 대량으로 만들어서 납품한다’고 말한다. 원래 서구 평리동의 한 할매가 손반죽으로 만들었는데 그 기술이 칠성시장 쪽으로 건너가 기업형으로 발전한 것이다.
50년 넘게 시민들의 사랑을 받다보니 만두 명가도 생겨났다. 마니아들은 교동납작만두, 미성당, 그리고 남문시장 내 ‘남문납작만두’를 ‘대구 납작만두 3인방’으로 부른다. 이들은 서로 맛, 두께, 양념으로 차별화하며 각자의 장점을 뽐낸다.
이제 교동시장도 세월 속에서 많은 변화를 맞고 있다. 라디오, 전축, CD, 워크맨을 팔던 전자제품 상가들은 겨우 명맥만 유지하고 있다. 캐러멜, 버터, 사탕, 초콜릿을 파는 노포(老鋪) 상인들은 1평 남짓한 점방에서 소일한다. 이제 물건을 판다기 보다는 세월을 팔고 있는 것에 가깝다. 하루 종일 5만원도 못팔 때도 있지만 그래도 자신을 지탱해주던 삶터이기에 관성적으로 나오는 것이리라.
‘빨간집’의 주인할머니는 “학생 때 드나들던 애들이 나중에 자녀들과 함께 올 때가 가장 즐겁다”고 말한다. 전통시장의 온기와 추억이 세대를 넘어 전해지는 순간이기 때문이다. 여기에 자신들의 삶과 애환이 함께 녹아있기에.

한상갑 기자  arira6@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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